작년 가을 전주에서 만경 출신 한 어르신으로부터 들었던 옛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옛날에는 만경이 김제보다 아니... 한반도에서도 아주 큰 고을이었다네. 먼 옛날 마한 시절부터 만경에는 성이 있었는데 만경성에는 샘이 여섯 개 있었다는 말이 전해오지. 당시 사람들은 거주지를 성 안과 성 밖으로 구분하여 성 안 사람을 ‘대문 안 사람’ 성 밖 사람을 ‘선바끄 사람’이라고 했다고 하네. 큰 돌로 둘러싸인 성의 테두리에는 천 년을 사는 팽나무를 심었지. 그 팽나무가 이백 년쯤 되면 팽나무에 옹이가 생기고 얼마 후엔 그 옹이가 빠지고 나면 구멍이 남지. 그 구멍에 올빼미 가족이 들어와 살았어. 야행성인 올빼미들이 팽나무 구멍에 살면서 마을을 지킨 셈이지. 성 안에는 감옥이 있었던 ‘옥거리’, 성 밖에는 말을 묻었던 말무덤이라는 뜻의 ‘말모동’이라는 옛날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네. 옛 성터에서는 이끼 낀 성돌이 굴러 내려오기도 했지.”
어르신은 만경에 이어서 김제의 여러 면에 얽힌 이야기도 지치지 않고 들려주셨다.
“우리가 전에는 금만(金萬)평야라는 말을 많이 썼네. 김제에는 쇠 금(金) 자가 들어간 지명이 몇 군데 있어. 김제, 금구, 금산이라는 지명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또 잘 익은 벼 때문에 생긴 황금벌판, 황금물결이라는 말도 있지만 노령산맥이 낮아져 논이 되는 곳에서 사금을 채취하기도 했어. 우리는 논에서 쌀과 사금이라는 두 개의 금을 캤던 거야. 내가 1953년 6·25가 끝나고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 선생이 만경면사무소 앞에서 한 이야기를 들었네... 임진란 때 금만평야의 쌀이 없었더라면 조선 백성이 다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했지.”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 너머에 수평선이 보이는 금만평야를 품고 있는 우리 김제에는 만경 외에도 넓은 평야를 뜻하는 광활, 평야의 젖줄인 만경강이 흐르는 청하, 아름다운 달빛이 비친다는 월촌, 벽골제를 품고 있는 부량, 동학농민군이 머물렀다는 죽산과 백산, 용이 사는 연못이라는 용지, 하얀 갈매기가 날던 백구, 공자의 덕을 기린다는 공덕과 성덕, 봉황이 나아간다는 진봉, 봉황이란 말에서 한 자씩이 들어간 봉남과 황산이 있다네.”
그 후 역사책을 넘겨보니 우리 금만평야의 풍족함은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도 알려져 있었다. 금만평야와 마주한 중국 산둥반도는 석회암 땅이라 물을 담지 못해 논이 거의 없다. 논이 없어 쌀이 귀하니 밀이나 옥수수, 땅콩 같은 작물밖에 재배할 수 없었다. 산둥성에 흉년까지 들면 그곳 농민들에게 금만평야는 가고 싶은 땅이었다. 그들은 한반도로 갈 때는 세 개의 칼(刀) 중 하나는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벼를 거두는 칼(낫), 면발 자르는 칼, 옷감 자르는 칼을 가리킨다.
우리의 김제와 만경에서 살던 산둥성 출신 화교들이 이웃에 살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김제 시내에는 화교학교도 있었고 만경에는 전족을 하고 끼우뚱거리며 걷던 포목점 중국 할머니도 있었다.
또 한반도 바로 남쪽 일본의 큐슈 지방도 산이 많은 탓에 쌀 생산량이 적었다. 일제 때 죽산에 있었던 ‘하시모토 쌀 농장’이란 말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물러난 몇 년 후인 6·25 때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군산으로 내려온 피난민 오만명중 절반이 김제, 부안, 익산에 자리 잡았다. 그 후에는 군산과 황산에 주둔하던 미군들의 모습도 종종 보았을 것이다. 우리 김제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여러 나라 사람들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릴 적 김제로 이사 온 해인 1969년에는 김제 읍내에 극장이 세 개나 있었다. 그때는 늦가을이면 극장에서 쇼를 했다. 하춘화와 김세레나가 자주 왔는데, 김세레나는 빠짐없이 새타령을 불렀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로 시작하는 김세레나의 새타령의 가사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새타령을 들으면 왠지 금만평야 사람들의 너그러움과 흥겨움이 느껴진다. 금만평야는 먼 나라에서 오는 철새들을 품어 주었지만 역사적으로 여러 외국인들도 보듬어 주었다. 지금도 김제에 내려가면 우즈벡이나 네팔 청년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세월을 돌이켜보면 금만평야의 쌀에는 살이 끼었는지 우리 고장의 역사는 관의 착취로 민이 일으킨 동학혁명을 비롯 소작과 지주, 좌익과 우익 간 갈등의 쓰라림을 삼키기도 했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너그러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우리는 지금도 누가 별 것 아닌 일로 따지고 들면 ‘그리어 그러먼 그렇게 혀’라고 말한다.
얼마 전 김제소방서 앞 바위에 새겨진 정명실현(正名實現)이라는 공자의 말을 보았다. 한마디로 이름값을 제대로 하라는 말일 것이다. 금만평야 사람으로서의 품위와 너그러움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필자소개: 수필가 頃堤 곽정식
필자는 어릴 적 만경에서 기차가 다니는 큰 물인 김제에 나가 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호(號)도 만경의 고랑 경(頃)자와 김제의 둑 제(堤)자를 묶은 경제(頃堤)로 지었다고 한다. 만경(萬頃)에서 태어나 김제(金堤)로 나왔으니 한마디로 고랑에서 둑으로 진출했다는 말로 들린다.
* 이 글의 지적 소유권은 필자 곽정식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