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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7-2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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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방죽에서 놀던 추억들이 대부분이다.

기사입력 2026-01-3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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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 성덕면(聖德) 석동(石洞) 마을은 남쪽으로는 동진강 하류의 옛 포구였던 남포로 이어지는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겨울 강풍을 막아주는 야산이 둘러쳐 있고, 그 주변에서 여러 가지 밭작물을 재배하고, 그 아래에는 깊은 방죽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농산물과 어류 등으로 자급자족하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마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어서 점심시간에 얼른 집에 와서 밥을 먹곤 해서 도시락이라고는 싸 본 적이 없었다. 점심 후 가끔씩은 삶은 고구마 몇 개라도 가지고 가면, 밭이 없는 들녘 아이들이 좋아라 했다.

 

학교보다 먼저 다닌 곳이 교회였다. 면내의 유일한 교회는 2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후에 장로님이 되신 아버지가 주시는 헌금을 손에 꼭 쥐고, 교회까지 가는 길에 있는 서너 군데 구멍가게에서 비과로 유혹을 했지만 잘 참고 꼭 헌금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추억은 석동방죽에서 놀던 추억들이 대부분이다. 어 느날 잠자리를 잡으러 저수지 풀숲을 휘젓고 다니는데,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던 형님이 물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부르는 걸 보았다. 나는 일단 무시하고 잠자리 몇 마리를 더 잡고 나서 물 밖에 나왔는데 형님은 어디서 준비했는지 작은 막대기를 들고, 내가 물속에서 위험한 짓을 했다고 아프게 때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데리고 가서 단수수(사탕수수) 여러 개를 잘라 주면서 나를 달래려 했다. 하지만 위험한 짓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들은 이미 방죽의 풀이 없는 깊은 곳을 떠다니고 있었다.

 

개헤엄으로 시작은 했지만 이내 송장헤엄으로 코만 살짝 내놓고 드러누워 느긋이 저수지를 떠다니는 실력을 갖춘 국민학생들이었다. 수영이 끝나면 여수토로 이어지는 바위 언덕에서 따뜻한 바위에 귀를 대고 옆으로 누워 귓속의 물을 빼내곤 했다. 그러나 결국 중이염을 앓게 되고 이웃마을의 무면허 의사가 여러 번 왕진을 오기도 했지만 완치가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전주 이비인후과의 단골 환자가 되었고 결국에는 고막 천공으로 우측 귀의 청력을 잃었다. 그 후 한쪽 귀의 불편함으로 안고 살다가 50세 무렵에 전북대병원에서 고막 이식 수술이 가능해져서 이식 수술을 했고 청력을 회복했다.

 

겨울의 석동방죽은 또 다른 신나는 운동장이었다. 동네 형들이 만든 스케이트를 여러 번 넘어지면서 타다 보면 어느덧 어둠이 찾아오곤 했다. 동네 형들은 사각기둥의 목재를 대각선으로 자르고 철사를 고정시키고 못대가리를 끊어 브레이크 장치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해빙의 시기가 되어 가는데도 얼음치기를 하다가 친구와 둘이 얼음 밑으로 빠진 적도 있다. 친구들이 옷을 말리자며 불을 피웠지만 마르지도 않고 매캐한 불냄새만 집으로 안고가 어머니한테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지금은 석동방죽은 추억 속에만 있다. 식량 증산의 기치 아래 방죽은 논으로 야산은 밭으로 갈아엎었다. 석유 횃불 비추고 닭우리로 잠자던 붕어 잡던 일, 개구리 미끼로 가물치 잡던 일, 흐르는 물에 쐐기를 놓아 송사리 잡던 일 등이 이제 추억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 습지가 참 그립다.    
전 김제시장 곽인희

 

(kimjenew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