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7-20 21:34

  • 나의살던고향은 > 나의살던고향은

‘고향 생각 안 나냐’는 그 한마디가 잠시 나를 50여년 전의 김제로 데려갔다.

기사입력 2026-01-29 21:16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0
 


아이고, 여기는 요새 엄청 춥다. 잘 지내고 있지? 이번 설에 한국에 오는가? 안 온다고? , 고향 생각 안 나?’

 

점심 무렵 걸려온 죽마고우의 전화, 여느 때와 같이 일상의 안부를 묻고 실없는 농담 두어 마디 하고 끊었지만 고향 생각 안 나냐는 그 한마디가 잠시 나를 50여 년 전의 김제로 데려갔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백산면 석교리에 살았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먹물 좀 먹었던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마다하시고 넓디넓은 김제평야에 살면서도 논, 밭 한 마지기 없이 지내시다 방앗간을 하던 동네 아우의 호의로 읍내에서 싸전을 하셨고, 그런 샌님한테 여덟 남매의 생계를 맡기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시암거리 아주머니는 커다란 가죽가방을 이고 전주로 박물장수를 하러 다니셨다.(동네 우물이 우리 집 앞에 있어서 다들 어머니를 시암()거리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모님은 읍내로, 전주로 돈 벌러 가시고 형님과 누나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집에 혼자 남은 막둥이는 깡통 뚜껑을 대나무에 못질해서 만든 허름한 굴렁쇠를 굴리며 집 앞 논두렁 길을 따라 동갑내기 친구가 있는 교감 선생님 댁에 가서 놀다 해 질 무렵에야 돌아오곤 했다.(그때 나이가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석양에 논둑길을 굴렁쇠 굴리며 집에 돌아오는 나의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선하다.)

 

환진이네(교감선생님 댁)는 신식 양옥에 우리 집보다 간식거리도 많았지만 우리는 집에만 있지 않고 집 뒤 텃밭에서부터 뽕나무 언덕으로 다니며 삐비며 파리똥 그리고 오디 등을 따서 간식처럼 먹었고, 또 때로는 신작로까지 진출해서 고무신을 양손에 들고 따끈따끈해진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걱정스런 호통을 듣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호롱불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텃밭에서 수확한 고구마나 옥수수 등을 먹으며 전설따라 삼천리, 왕비열전 등의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같이 울고 웃었다.

 

전주로 장사 가신 어머니의 귀가가 늦어지면 어머니는 가끔씩 읍내에 있는 아버지의 싸전에 딸린 방에서 주무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옆집 원평댁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잠을 잤다.

 

어느 천둥번개 치던 날 잠결에 요강에 소변을 보고 나서 밖에 번개가 치는 걸 본 막둥이가 갑자기아따! 전깃불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며 방문을 열고 나가자 깜짝 놀란 원평댁 아주머니가 막둥이를 붙들러 가다가 요강을 걷어차서 온 식구가 오줌 벼락을 맞았던 일화는 훗날 두고두고 명절날 모인 가족들 사이에 추억거리가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은행에 다니던 큰 형님 덕에 온 가족이 읍내로 이사했다. 이사와 함께 집에 텔레비전과 전축 같은 가전제품도 함께 들어왔다. 그때는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많지 않아서 저녁 무렵 여로라는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에는 우리 집이 동네 영화관이 되었다. 특히 당시 국민 스포츠였던 축구나 프로 레슬링이 있는 날에는 사람들이 뒷마당에까지 빼곡히 들어차곤 했다.

 

·중등학교 시절 소풍 때마다 자주 가던 벽골제와 신털미산, 그때는 가까운 곳 놔두고 멀리 간다고 투덜댔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 역사적 의미에 재미있는 설화까지 더해지고, 또 김제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내가 김제 출신이란 것을 뿌듯하게 해준다.(1999년부터인가? 지평선 축제가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전주로 진학하게 되면서 나의 김제 생활은 막을 내렸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두 분 다 김제 선산에 모셔서, 천주교 성지에 있는 납골당으로 다시 모시기 전까지는 명절마다 김제에 가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며 동서로, 남북으로 새로운 길이 생겨나 김제까지 가는 길은 편해졌지만 때로는 산소를 찾을 때 애를 먹기도 하였고, 고향 마을뿐 아니라 가는 길에 보이던 시골집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내 추억의 조각들이 같이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 어귀에 있던 야트막한 고개며 고향집 그리고 집 앞 우물도 다 사라지고 없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죽마고우의 전화 한 통에 눈을 감고 옛 생각에 젖어 드니, 코스모스가 핀 논두렁길을 허름한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가는 막둥이의 모습이 떠올라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돋는다. 한메가 베트남 법인장 윤현택

 

 

 

(kimjenewsk@hanmail.net)